성공했다면 세계사를 뒤바꿀 수 있었던 희대의 암살작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9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독일 나치의 패색이 짙어지자 오래 전부터 나치의 군 장악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독일 국방군의 프로이센 귀족 출신 장교들은 나치 체제 전복을 위한 쿠데타 계획을 수립했다.



독일군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깊은 신망을 받고 있던 '루트비히 베크' 대장 등 고위 장교들이 가담한 이 암살 및 쿠데타 계획의 내용은 단순했다.


*루트비히 베크 대장


폭탄을 이용해 히틀러를 제거하면, 국방군이 장악하고 있던 예비군 조직을 이용해 베를린과 독일 각지의 주요 시설을 점거하고, 나치에 충성하는 경찰과 친위대 조직을 제압한 뒤 베크 대장을 임시 수반으로 추대하여 연합군과 항복 협상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아래 가장 위험한 암살 임무는 국방군 본부 예비군 참모였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맡았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라슈텐부르크'에 있는 히틀러의 비밀 지휘소 '늑대굴'에서 히틀러가 주재한 전시 작전회의에 예비군 동원 계획을 보고하기 위해 참석했는데, 이 늑대굴에는 아무리 고위 장교라도 무기 등 금속을 휴대하고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액체와 플라스틱을 이용한 폭탄을 휴대하고 회의장에 들어갔다.



이 폭탄은 연합군이 프랑스에 있는 레지스탕스에 공급하기 위해 제작한 특수 폭탄이었다. 플라스틱 시험관 안에 들어있는 캡슐을 깨뜨리면 시한신관이 작동하면서 정확히 10분 후에 폭발하는 구조였다.


작전 당일,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장에 다소 늦게 들어가 작전 테이블 아래에 폭탄 가방을 내려놓았고, 발을 뻗어 다른 참석자들 몰래 그 가방을 히틀러 발 앞에까지 밀어 넣고 회의장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속부관인 '하인츠 브란트' 대령이 그 가방을 발견하고 거추장스러운 가방을 히틀러가 발견하면 싫어할 것이라고 판단, 그 가방을 옆으로 치우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잠시 뒤 폭탄이 터지면서 지붕이 날아가고 창문이 깨지는 등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폭탄을 자기 쪽으로 치웠던 브란트 대령 등 3명이 즉사하고 참석자들 상당수가 중상을 입었으며, 히틀러 역시 고막이 터지고 팔과 다리에 나무 파편이 박히는 등 상당한 부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마침 폭탄이 터질 때 히틀러가 작전지도를 자세히 보기 위해 테이블 깊숙이 몸을 숙인 상태였고, 두꺼운 참나무 테이블이 폭발의 충격을 상당 부분 막아주면서 히틀러는 크게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작전 이후, 히틀러가 사망했다고 판단한 반나치 조직은 병력을 동원해 친위대 사령부를 포위하고, 예비군 사령관이었던 프롬 대장에게 병력을 출동시켜 쿠데타에 가담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날 오후 히틀러가 자신의 건재함을 발표하자마자 반란군에 대규모 이탈자가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건 직후 히틀러는 친위대와 게슈타포를 총동원해 가담자 색출에 나섰고, 약 7,000여 명이 체포되고 그 중 5,000여 명이 처형당했는데, 이 가운데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반란 세력으로 몰려 강제 자살로 내몰린 '에르빈 롬멜' 장군도 있었다.



이들의 작전이 성공했다면 세계사를 바꿀 뻔했지만, 나무 테이블 하나 때문에 실패한 희대의 암살작전 '발키리 작전''영화(작전명 발키리)'로도 제작되어 대중의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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