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독립을 위한 임시정부 '광복군'의 마지막 임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망이 짙어질 무렵인 1945년 8월 10일, 미국의 특수훈련을 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 미군의 수송기를 통해 한반도에 투입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로써 빼앗긴 주권을 우리 힘으로 되찾아 오는 자주독립이 눈앞에 온 것이다."



수십 년간 역사가 기록하지 못했던 광복군의 군사작전...

1945년 2월, 미국 전략 첩보국(OSS) 관계자와 마주 앉은 한국인 남성,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이었다.


"대한민국 광복군과 아메리카 합중국이 공동으로 비밀작전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이범석 2지대장



그리고 얼마 후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적절한 장비를 지급하여 교육한 뒤, 한반도 내에 투입! 한반도 후방에 전선을 형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한다.


이 계획안은 워싱턴의 OSS의 검토를 거친 뒤, 3월 13일에는 미군 '중국전구사령부'에 보고되어 실행단계에 이르렀다. 이로써 광복군은 미국과의 비밀 작전을 수립하게 되고, 이를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이라 명명한다.


이 작전은 미국이 광복군에 훈련과 장비를 제공하는 대가로 광복군은 대일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미국에 제공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미국은 광복군의 훈련을 위해 군수, 통신, 재정, 행정 장교를 포함해 40명의 기간요원을 파견했다. 광복군은 기수를 나누어 병력을 선발하였으며 1기로 선발된 125명은 정보 수집을 위한 첩보교육에 중점을 두고, 매일 8시간씩 훈련이 실시되었다.



1945년 8월 4일, 광복군 1기생의 훈련이 완료되고, 38명이 교육과정을 통과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5일, 드디어 광복군에 첫 번째 명령이 하달된다.


1. 비행기와 잠수함으로 한반도에 침투하라

2. 한국에 배치된 일본군의 상태를 파악한 뒤 미군의 상륙을 지원하라


명령을 하달 받고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광복군 그런데... 

"작전은 취소되었다. 부대로 복귀하라"는 뜻밖의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어떻게 된 것일까?



광복군의 독수리 작전 개시 바로 다음 날인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여된다. 뒤이어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여되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이로써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이로써 전후 처리에 대한 모든 권한은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넘어가게 되고, 눈앞에 조국을 두고서도 중국으로 퇴각해야 했던 광복군... 빼앗긴 주권을 스스로 찾지 못하고 남의 손으로 풀려난 역사를 기록하게 될 한국에 광복군은 기쁨 속에 분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왜군의 항복은 기쁨의 함성을 울리며 박차고 일어나 춤이라도 춰야 할 터였지만 그럴 심정이 아니었다. 왜놈들을 우리 스스로 몰아내지 못한다는 허탈감 때문이었다."

- 광복군 김준엽


"천신 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준비를 한 것이 다 허사가 되었다. 작전이 실패하면서 강령에 따라 우리(임시정부)의 발언권도 없어지고 말았다. 자주독립을 하지 못함에 개탄할 뿐이다."

- 백범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과 연합군의 합동작전인 <독수리 작전>은 미국의 정보기관, OSS에서 1급 기밀로 보관해 오다 30년이 지난 뒤에야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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