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절,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넘어간 주한 미군들

한국전쟁 이후 총 6명의 주한 미군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탈영했다. 이들은 북한이 좋아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모두 북한을 경유해서 소련으로 가고 싶은 계획이 있었지만 북한이 어떤 나라라는 것을 전혀 모른 무지에서 만든 계획과 실천이었다.



   래리 알렌 앱셔 일병 (1943~1983)



전후 최초로 월북한 미군인이다.

1962년 5월 월북했다. 일리노이 주 어바나 샴페인 출신이다. 북한은 1978년 '앱셔'에게 '아노샤'라는 납치 태국여자를 붙여주고 결혼을 유도했다. 그녀는 마카오의 마사지실에서 윤락녀로 일하다가 납치되어 왔었다.


1983년 7월 11일 앱셔는 40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사망했다. 결혼 후 부인 아노샤는 북한 당국에 의해 끌려가 독일인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 일병 (1940~ )



지금도 평양에 살아 남아 있는 미군이다.

그는 입대 후 독일에서 2년간 복무하고 귀국해보니 본처가 이혼을 요구하며 이미 그를 떠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시 입대하여 한국 휴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휴전선 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위조한 외출증으로 무단 외출을 했다가 미귀 사건을 일으켰다. 중대에서는 이를 보고했고 그는 탈영병으로 분류되었다.


그는 뒤늦게 귀대했지만 가짜 외출증에 지휘관 사인이 위조한 것임이 들통 나서 처벌 받게 되자 월북을 결심했다. '드레스녹''앱셔'보다 넉 달 뒤인 1962년 8월 15일, 백주 대낮에 동료들이 점심을 먹는 사이 지뢰밭을 가로 질러 북한으로 넘어갔다.


북한에서 그는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완전 백인 얼굴의 첫 아들 제임스는 북한 국적으로 평양 외국어 대학을 졸업했다. 제임스는 미국식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북한 억양이 강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다.



   제리 웨인 파리쉬 병장 (1944 ~ 1996)



켄터키 주 모간휠드 출신.

휴전선을 넘어간 탈영병으로 자세한 것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다른 미군 즉 앱셔, 드레스녹에게 장기간 세뇌 교육을 받은후 탈영을 결심한것으로 보고있다. 그는 20년간이나 앓아온 신부전증으로 1996년 사망했고, 그의 처와 자식들은 아직 북한에서 살고 있다.



   찰스 로버트 젠킨스 하사 (1940~ )



월북 미군 중에서 가장 유명해진 사람이다.

1955년 미군에 입대해서 월북시 군 생활 10년차였던 분대장이었다. 그는 그의 부대가 월남으로 이동한다는 소문에 겁을 먹고 1965년 1월 4일 새벽 분대 야간 순찰 중 월북했다.


그는 월북 시 맥주를 열 캔 정도 마시고 충동적으로 월북했다고 했는데 술이 깨자마자 자기의 행위를 대단히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월북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주체사상을 교육받았고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1980년 북한이 납치해온 일본인 21살의 일본인 간호원 '소가 히토미'와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젠킨스'는 2004년 일본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김정일의 의도와 납치 일본인들을 찾아오겠다는 일본의 의지가 결합되어 일본으로 건너왔다. 미군의 관용으로 6일 만에 불명예 제대의 처분만 받고 히토미의 고향 일본 사도 섬으로 이주, 현재도 살고 있다.



   로이 정



월북 미군으로만 알려졌지만 신상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1979년 월북했다. 성[chung]으로 보아 한국계인듯하나 중국계일 가능성도 있다.



   조셉 화이트 일병 (1961 ~ 1985년)



이 사람은 가장 늦게 월북한 미군이다.

1982년 8월 28일 탈영, 월북했다. 월북 뒤 그는 북한의 방송에 나와서 불안한 표정으로 미군의 타락과 부패등에 대해서 맹비난했다. 그러고 그의 행방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는데 1983년 그의 어머니는 그가 북한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고 영어 선생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그의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1985년 11월 5일, 그의 어머니는 북한 정부로부터 그가 월북후 청천강에서 수영을 즐기다가 익사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이에 자세한 죽음의 설명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북한 정부로부터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월북한 미군들은 모두 북한이 아니라 소련행을 희망했었다.

그러나 기대치 않게 북한에 억류되자 60년대에 월북한 미군 탈영병 4명은 1965년 평양의 소련 대사관을 찾아가 정치적 망명처를 요청했지만 소련은 이들을 모두 북한 당국으로 넘겼다. 이후 미국인들은 소련행의 희망을 포기하고 북한에서 사는 길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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