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B급 전범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조선인

그의 이름 '홍사익', 일제의 압박에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홍사익 이라는 이름을 고치지 않았고, 늘 일본말을 했지만 조선식 억양을 일본식으로 바꾸지 않았다. 누군가 이 점을 지적하면 "내 출신이 조선 아니냐"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제헌,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청산리대첩'의 영웅 '지청천(1888~1957)' 장군이 홍사익의 일본 육사 동기이다.


*청산리대첩 승리 자축 기념사진


1889년, 경기도 안성 양반집안에서 태어난 양반으로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된, 속칭 '친일파'이기도 하다.


홍사익은 현대로 치면 '육군사관학교'와 같은, 정석적인 군인 양성 기관을 통해 일본군 장성에 올랐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운데, 이는 조선인 유일의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례로 대한제국군 고위 간부의 지위가 한일합방 이후의 일본군 장성 계급으로 유지된 타 조선인 장성들과는 크게 구별된다.


*홍사익


전선에서의 삶을 짤막하게 요약하면, 52세에 육군 소장으로 보병 108여단장, 55세에 육군 중장으로 승진 및 필리핀 '포로수용소'소장, 그해 12월에 필리핀 '14방면 병참감(군수 물자를 담당하고 관리하는 책임자)'을 마지막으로 종전을 맞이한다.


홍사익은 당시 일본군 고위 장교의 지위 때문인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내막은 달랐다. 그는 '독립운동가' 와 우정을 유지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은 홍사익에게 부대를 이탈하여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기를 권했지만 홍사익은 이를 거절하고 이렇게 말한다,


*지청천


"내가 부대를 이탈한다면 일본군 내의 조선인의 입지는 더욱 낮아질 것이다."


그가 조국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의 군대 내에서 일본의 장교로 복무하였던 이유 또한, 조선인이 일본 아래서 충실히 봉사한다면 더 많은 권리를 얻고 결론적으로 동등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아무리 그처럼 발버둥쳐 봐도 결국 조선인은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다.


홍사익의 생각은 당시 아시아의 일류 초강대국인 일본 제국의 모습을 고려하여 본다면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이나고 홍사익은 일본군 포로수용소 소장의 경력으로 전범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 아래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의 소망이었던 수학교사로서의 생활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일본군에 종군하고 결론적으로 일본에 이득이 되는 행동에 앞장섰던것은 사실이었기에 사후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되는 불명예를 얻었다.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일본군에 종군하거나 친일 행위를 하였고, 이후 전범재판에서 사회적 몰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배척되거나 처형되었으며, '친일 인명사전' 등에 이름이 기록되어 영원히 지속되는 사람들 또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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