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없는 아이슬란드가 영국에 선전포고 한 이유

우리에게는 '꽃보다 청춘'으로도 잘 알려진 '아이슬란드(Iceland)'는 대서양의 북극권에 있는 제법 큰 섬나라로 국토의 크기가 대략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총인구가 불과 30만에 불과한 약소국이다. 전통적으로 수산업과 관광산업이 이 작은 나라의 기반 산업이다.



군사적으로 볼 때도 지상군이 약 120명 정도이고, 경비정이 4척인 해양경비대, 공군은 없으며 헬기만 4대인 그야말로 웬만한 국가의 지역 경찰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민망한 수준이다.



따라서 1949년, NATO 창설 12개국의 일원이었을 만큼 국가의 방위를 대외 동맹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국가이다. 엄밀히 말하면 아이슬란드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본인들 의사와 관계없이 국제 동맹 체제에 가담하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1986년 냉전체제의 해체를 예고한 '레이건''고르바초프'의 역사적인 회담이 열린 곳이 바로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Reykjavík)'이었을 만큼, 냉전 시기에는 미국이 소련을 감시하기 위한 전략 시설물들을 이곳에서 비밀리에 운용했고, 주변 해역에 이를 역 감시하기 위한 소련의 함대가 수시로 출몰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처럼 군사적으로 자위권을 행사하기에도 터무니없이 작은 초미니 국가가 지난 1976년, 영국에 일전불사를 외치고 나왔던 적이 있었다.



영국이 아무리 '늙은 사자'이지만 건방지게도 하룻강아지가 사자에 덤빈 형국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면 영국이 아이슬란드를 요리하는 데 불과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겠지만 영국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한마디로 초등학생이 격투기 챔피언에게 싸움을 걸었다고 결투를 벌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세계의 이목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아이슬란드도 자신들이 이길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지만 결코 장난으로 영국과 대결하려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게는 극히 일부지만 한마디로 아이슬란드에게는 모든 것이 걸린 문제였다.


분쟁은 1976년 초 아이슬란드가 선포한 200마일 배타적 경제수역과 관련이 있었다. 영국 트롤 어선단이 아이슬란드가 선포한 배타적 경제수역 무시하고, 아이슬란드 수역 안에서 조업을 계속하자 이를 쫓아내기 위해 해양경비대가 출동했다.



이에 영국 해군은 자국 어선단 보호를 명분으로 군함들을 출동시켰다.



이러한 영국의 적반하장식 행태에 아이슬란드는 분개했고, 영국과의 단교 선언을 하며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중재로 간신히 실전은 면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이 아니었고, 이미 1958년과 1972년에 두 차례에 걸쳐 있었던 충돌의 연장선이었다. 그때마다 아이슬란드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영국과 처절히 맞섰다. 아이슬란드가 영국 해군을 상대하기 위해 동원한 장비는 어선을 개조한 작은 보트였을 뿐이었지만 거친 북해의 바다 위에서 영국의 구축함들과 당당히 대치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이슬란드 근해에서 무슨 고기가 잡히기에 이렇게 나라의 운명을 걸고 전쟁까지 불사했던 것일까?


바로 유럽인들에게 최고급 어종에 속하는 '대구(Cod)'때문이었다.



아이슬란드 근해는 한랭 어종인 대구가 우글거리는 황금 어장인데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아이슬란드에서 어업은 국가의 생명선이기 때문에 이처럼 전쟁 불사까지 외치고 나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원만하게 타협이 이루어졌지만 만일 1970년대 영국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이었다면 아이슬란드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아이슬란드만큼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적어도 국익을 지키기 위한 노력만큼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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