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권력을 누릴 것 같았던 독재자들의 비참한 최후

철권통치로 국민을 억압하고, 무한한 권력을 누렸던 독재자들... 이들은 자신의 무한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국민의 삶을 가난과 절망으로 이끌었다. 이들 중 꽤 많은 이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 4인을 소개한다.



   독일 총통이자 2차 세계대전의 전범 '아돌프 히틀러'



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쟁 막바지 연합군이 베를린 인근까지 진격하고 끝내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베를린의 지하 벙커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 후 곧바로 청산가리를 삼킨 채 머리에 총을 쏴 자살을 했다.


히틀러의 유언으로 그들의 시체는 부하들의 손에 화장됐다. 그는 생전 여러 차례 부하들에게 자신의 시체가 적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편 그는 죽기 전 '요제프 괴벨스'를 총통으로 지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괴벨스 역시 아이들을 죽인 후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당수이자 총리였던 '베니토 무솔리니'



그는 쿠데타로 독재 정권을 수립한 뒤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건하겠다는 명분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1940년에는 독일과 함께 파시즘 진영을 구성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패전을 거듭했다. 이후 계속되는 독일의 패전과 연합군의 승리가 눈앞에 다다르자 무솔리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페인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이렇게 탈출을 감행하며 알프스산맥을 넘던 무솔리니와 그의 연인 클라라 페타치는 1945년 4월, 이탈리아의 반 파시스트 유격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붙잡힌 즉시 총살당했는데, 처형당한 무솔리니와 페타치의 시체는 밀라노로 보내졌다. 사람들은 광장에 거꾸로 매달린 그들의 시체에 침을 뱉고 욕설을 했다.



   24년 동안 루마니아를 철권통치했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



1967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 원수가 된 그는 집권 초기엔 소련의 간섭에 맞서는 외교 노선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곧 배우자인 '엘레나 차우세스쿠'를 비롯한 자신의 일가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며 권력을 독점해 나갔고, '세쿠리타테'라고 불리는 친위 조직을 두어, 반대파를 암살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무리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고, 실패한 정책을 수습하고자 농산물은 대량으로 수출해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했고, 피임·낙태를 전면 금지하는 식으로 출산율만 무턱대고 높여 국민의 삶을 가난과 절망으로 이끌었다. 이런 독재 정치를 더 이상 참지 못한 루마니아 국민들은 1989년 12월 반 정부 시위를 일으켰다. 이때 차우셰스쿠는 군대로 시위대를 진압을 하려 했지만, 군부 역시 반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시위는 전 국민적인 혁명으로 확산됐고, 차우셰스쿠 부부는 수도에서 탈출하려다 혁명 군대에 붙잡혔다. 이렇게 체포된 차우세스쿠와 그의 아내는 군사법정에서 국가 반역, 집단 학살, 국가 경제 파탄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차우세스쿠 부부는 160여 발의 총알 세례를 받았는데, 이 장면은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무려 42년 동안 리비아를 통치했던 국가 원수 '무아마르 카다피'



그는 1969년 친 서방 성향의 왕정을 쿠데타로 무너뜨린 뒤 최고 권력자가 됐다. 집권 초기에 헌법을 폐기한 뒤 선포한 '자마히리야'란 체제를 통해, 독재를 이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자마히리야 :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가 혼합된 체제


그는 반 서구주의와 반 유대주의를 주장하며, 미국과 영국의 군사기지를 철수하고 외국계 석유회사를 내쫓았다. 전 세계 게릴라 단체들과 제3세계 국가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자신의 아들들을 정, 재계 주요 요직에 앉혀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고, 무엇보다 인권 탄압과 무장 테러 단체 지원, 핵실험 의혹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이런 장기간 독재에 2011년 리비아 벵가지 지역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카다피는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명했다. 이에 UN은 카다피 정권의 반인륜적 학살을 제재하고자 반정부 시민군을 지원했다. 그렇게 시작된 리비아 내전, 약 8개월간 이어진 정부군과 시민군의 대립은 카다피가 고향인 시르테에서 사살되며 막을 내렸다.



카다피는 공습을 피해 하수구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었는데, 생포 당하는 순간 "쏘지마!"라고 거듭 외쳤다고 한다.



그러한 외침에도 그는 시민군의 총을 피할 수 없었고, 42년간 가장 높은 자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독재자는 결국 하수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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