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국도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침공

냉전시절 활약됐던 '첩보기'들은 보통 적국의 공해 상공에 출몰하여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고, 상대방의 대응을 점검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고의로 상대 영공을 침범해 자극적인 도발 행위를 실시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해당 국가의 항의가 있으면 단지 실수였다고 얼버무리거나 침묵하는 정도였다.

사실 분명한 군사적 도발이지만 그렇다고 이것 때문에 전쟁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냉전 시기 백주대낮에 소련 전투기가 서유럽 상공을 횡단하여 민간인을 살상한 사건이 있었다.

1989년 7월 4일, 프랑스 국경과 인접한 벨기에의 평온한 시골 마을 '코오이겜'에 살던 19세 '빔 드라르'는 아버지 소유의 농가 테라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늘에서 굉음이 들려왔고, 그가 고개를 들어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추락하는 소련의 'MIG-23' 전투기였다.

곧이어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은 추락한 전투기 날개 잔해 속에 붉은 별을 확인하고서 소련의 전투기라는 것을 금방 인지할 수 있었으나 소련 국경에서 900km 이상 떨어진 이곳 서유럽 벨기에의 시골 마을에 어떻게 소련 전투기가 나타난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전투기에서는 소련 조종사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고, 인근에서 소련 전투기 조종사가 발견되었다는 제보도 없었다. 조종사도 없이 서유럽을 침공(?) 한 소련의 MIG-23 전투기...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이곳까지 날아온 것일까?

추락 2시간 전, 폴란드 콜로브젝의 소련 공군 기지에서 '니콜라이 스쿠리딘' 대령이 조종하는 '미그 23전투기'가 떠올랐다.

스쿠리딘 대령은 총 2,000시간 이상의 비행기록을 가진 베테랑 조종사였으나 사실 그는 소련 공군의 실전 조종사가 아닌 소련 239 전투비행사단의 정치장교였다. 하지만 정치장교도 정해진 비행시간을 이수해야 하는 소련 공군의 복무규정에 의해 그날도 그는 미그 전투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이륙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미그기의 왼쪽 엔진에서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고, 곧 계기판의 경고 장치가 엔진 정지를 알려왔다.

육안으로 엔진 이상을 확인한 스쿠리딘 대령은 조종 매뉴얼 대로 전투기의 기수를 바다 방향으로 향하게 한 후 비상 탈출에 성공한다.

이후 추락하던 전투기의 엔진이 원상 복구되면서 MiG-23은 다시 비행을 시작했고, 어떻게 할 틈도 없이 폴란드와 동독을 넘어 곧바로 서유럽으로 진입했다. 이에 놀란 나토가 전투기를 출격시켜 요격에 나섰지만 조종사가 없었고, 소련으로부터 어떠한 내용도 통보받지 못한 상황이라 그저 MiG-23을 쫓아만 갈 뿐이었다.

적당한 위치에서 격추시켜야 했지만 비행경로에 민간인 거주지가 많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하던 중 MiG-23의 연료가 바닥나며 이륙 지점에서 800여 km 떨어진 벨기에에 떨어져 현지인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써 MiG-23은 본의 아니게 서유럽을 공격(?) 한 최초의 소련제 전투기로 기록되었다.

"만약 미그기가 조금만 더 날아 프랑스의 산업 도시 '릴'에 추락했다면, 그 여파가 어떠했을지 추측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 당시 벨기에 내무장관 루이스 토벡

사건 발생 이후 당연히 벨기에 정부는 격렬히 항의하였으나 소련은 어떠한 사과는커녕 어떠한 대꾸도 없었고, 피해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의로 여객기를 격추시켜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던 소련의 행위를 상기한다면 어쩌면 이런 대응이 당연하였는지도 모른다.

＊대한항공 KAL기 007편 격추 사건

인명 피해를 내고도 사과도 없이 뻔뻔하게 나올 수 있었던 그런 어이없는 상황이 바로 냉전 시대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