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주변국의 핵 도발에 대처하는 방법
- 밀리터리
- 2018. 8. 31. 06:00
1979년, 2차대전 종전 후 미국에 핵 개발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자체적으로 핵 개발에 성공한 프랑스는 당시 핵관련 기술과 우라늄 등을 원하는 국가에 판매하고 있었다. 여기에 이스라엘도 수혜자 중의 하나로써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핵 개발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상황을 미뤄볼 때 주변국의 핵 개발은 용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대치 중인 이라크에게도 핵기술을 판매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1979년, 원자로 노심을 싣고 이라크로 향하던 프랑스 화물선에 대한 폭파 시도가 있었고, 이듬해인 1980년에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 중이던 이라크 핵 개발 책임자가 호텔에서 의문사로 사망한다.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프랑스 국적의 한 여성은 경찰 증언에 출석하기도 전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으며, 원자로 건설에 참여한 프랑스인 기술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죽음 뒤에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관련되었다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었다.
한편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공식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이라크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한 필사적 노력을 펼쳤으나 국제 사회의 공분을 이끌어내는데 역부족이었고, 국제 사회의 도움만으로는 이라크 핵 개발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스라엘은 결국 단독으로 이라크 핵시설에 대한 직접 타격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바빌론 작전'이라 명명한다.
이스라엘이 결심한 선제 타격, 바빌론 작전은 모사드조차도 "성공 가능성이 낮은 비현실적 작전이며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될 수 있다"라고 평가한 작전이었다.
1981년 6월 7일(일요일) 오후 4시, 이스라엘 시나이 반도의 '에치온 공군 기지'에서 'F-15A' 6대, 'F-16' 8대가 이륙한다.
당시 이스라엘 정부는 프랑스와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라크 핵시설에 파견된 프랑스인 근무자가 없는 일요일을 작전 일로 잡았다.
2천 파운드급 폭탄을 장착한 F-16 전투기들은 F-15A의 엄호를 받으며 타국가에 발각되는 것을 피해 인적이 드문 사막지대를 골라 1,100km를 비행해야 했고, 이라크의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기 위해 45~60m의 초저고도 비행 침투를 실시했다.
그리고 목표지점에 무사히 도달하자 폭탄을 장착한 F-16 전투기들이 위, 아래 급강하 기동을 통해 이라크 '오시라크 핵시설'에 폭격을 실시하였다.
위, 아래 급강하 기동을 통한 공격 이유에는 중력가속도를 이용하여 원자로의 돔 내부까지 확실하게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2천 파운드급 폭탄이 투하되자 핵 시설의 돔 구조가 파괴되었고, 미리 설정해놓은 지연신관 덕분에 폭탄이 노심까지 파고들어가 원자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작전기 들은 고도를 높여 무사히 이라크 영토를 빠져나와 단 한대의 손실 없이 무사귀환하는데 성공한다.
이 공격을 통해 당시 원자로 시설에 머무르고 있던 이라크인 기술자 10여 명과 프랑스인 기술자 1명이 사망하게 된다. 전격적인 이스라엘의 원전 공습 직후, 이스라엘은 모사드의 예측 대로 전 세계의 비난 여론에 직면해야 했다.
1981년 6월 9일 자 뉴욕타임스는 "이스라엘의 망상"이라는 글까지 써가며 이스라엘의 호전성에 대해 비판하였고, LA 타임스는 이 공습을 심지어 "테러"라고 표현했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는 "정당화할 수 없는 국제법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표현했고, 주 UN 미국대사 '진 커크패트릭'은 충격적이란 표현을 써가며 당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빗대기까지 하였다.
그 후로 10년이 흐른 1991년, 오시리크 원전 공습 당시 이스라엘 공군 장성으로써 공습 계획을 주도했던 '다비드 아이브리'장군은 주미 이스라엘 대사로 근무하게 된다. 이때 미 행정부는 다비드 대사에게 붕괴된 오시라크 핵시설의 위성사진을 선물로 증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감사를 전했다.
"다비드 아이브리 장군께 감사와 치하를 드립니다. 장군께서는 이라크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1981년에 중단시키는 걸출한 업적을 남기셨고, 그로 인해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걸프전)을 수월하게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작전 당시에 이스라엘을 맹비난했던 미국도 10년의 세월이 지나 당시의 판단에 대한 존중과 감사를 보내게 된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오시라크 핵시설을 타격하지 않았다면 걸프전 당시 이스라엘에 스커드를 날렸던 후세인이 그곳에 핵탄두를 탑재하여 날렸거나 쿠웨이트에 증원 중인 다국적 군에게 핵탄두를 날렸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밀리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정된 공간속 전장에서 입증된 수직 이착륙기의 성능 (0) | 2018.09.02 |
---|---|
중국의 항공모함이 여전히 짝퉁으로 취급받는 이유 (0) | 2018.09.01 |
영국 왕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는 방법 (0) | 2018.08.30 |
호위 전력 없이 항모를 운용한 아르헨티나의 최후 (0) | 2018.08.29 |
침략국도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침공 (0) | 2018.08.28 |
이 글을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