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조선의 마지막 왕자

일제강점기 시대인 1912년,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아들인 '이우 왕자'가 태어난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던 이우왕자는 1922년, 11세가 되던 해, 일본으로 넘어가 '유년 학교'에 입학한 뒤,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육군대학을 졸업하게 되고, 이후 일본군의 포병장교로 임명되어 일본 군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조선의 왕족이었던 그가, 운현궁을 벗어나 일본군 장교로 살아가게 됨으로써 일본은 자신들의 식민지배가 정당하다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고, 이우 왕자는 그러한 정당화의 홍보 도구로 활용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애국심과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은 일본의 군복으로 숨길 수 있을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이우 왕자는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일본인 급우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키는 등 요주의 인물이었다.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사용했고, 조선인으로써 절대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술자리에서는 일본 총독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된, '황성 옛터' 라는 노래를 즐겨 부르며 조선에 대한 그리움을 가감 없이 표출하기도 했다.



그리던 중 1935년 5월 3일, 일본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강요와 친일파의 손녀와 혼인이라며 반대하는 국내 여론을 뒤로하고 이우 왕자는 조선 여성 '박찬주'와 혼례를 올리게 된다.


당시 일본은 조선 왕족의 결혼을 통제하며 일본 왕족과의 정략결혼을 강요했는데, 이러한 일본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이우 왕자는 "일본인과 결혼할 수 없다." 라며 버텼으나 일본의 압박에 "조선의 왕족인 내가 일본인과의 혼인은 상상할수도 없는일이다. 차라리 친일파인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하게된것이다.



*당시 일본 왕족들과 줄줄이 결혼하던 조선 왕족의 상황을 보면, 이우 왕자는 조선인과 결혼 했다는 것 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이우 왕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의 정보참모 보직에 있으면서 은밀하게 독립군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이를 눈치챈 일본군은 이우 왕자의 보직을 교육 참모로 변경시켰고, '히로시마'에 있는 육군학교로 전출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이우 왕자는 1945년 7월 일본의 히로시마로 떠나야 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다.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 이우 왕자는 히로시마 어딘가에서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 세계에 항복을 선언한 그날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이우 왕자의 장례식이 치러진다. 그런데 2007년에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 일본의 전범들이 묻힌 야스쿠니 신사...



그곳에 이우 왕자의 위패가 합사된 사실이 알려지며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에 야스쿠니 신사 측은 "사망한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황족과 동등한 지위였던 이우 왕자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라고 밝힌다.


조국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던 대한 제국의 왕자 이우 그는 독립된 장래의 한국은 제국이 아니라 민국이 되어야 된다는 주장을 펼치며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평생 동안 일본의 볼모로 살아가며 조국으로의 귀환을 바랐던 인물 대한제국의 왕자 '이우'의 혼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묶여 죽음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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