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물량전을 대표했던 '리버티급' 수송선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프랑스의 항복 이후 독일에 맞서 홀로 싸우던 영국은 중립을 고수하는 미국을 제1차 대전 당시처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썼다. 그런 영국에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일본의 진주만 급습은 그야말로 고립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1941년 12월 22일, 미국의 참전을 종용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처칠과 급속도로 친해진 루스벨트는 "배로 된 다리로 미국과 영국을 연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결과적으로 진주만 급습이 벌어지면서 미국은 결국 전쟁에 발을 들여놓았고, 당연히 지금까지 준비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전쟁 물자들이 당장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은 자국에 있는 산업시설을 풀가동해 붕어빵 찍어내듯 엄청난 양의 전쟁 물자들을 만들어냈고, 물자들과 병력을 실은 수송선들이 종전될 때까지 쉴 새 없이 대서양을 왕복했다. 그중에서도 '리버티선'은 루스벨트가 약속한 것처럼 대서양을 연결한 다리와도 같은 구원의 상징이었다.


*리버티선은 연합국에서 사용한 리버티급 수송선을 말하며, 1945년까지 총 2,710척이 건조되었다.


당시 유류 수송형, 병력 수송형처럼 적재 화물에 따른 세부 모델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도면과 표준화된 건조 방식으로 미국 내 총 17개 조선소에서 동시에 제작된 리버티선은 그야말로 미국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1척당 평균 건조 속도가 24일이었을 만큼 엄청났는데, '로버트 피어리'호의 경우는 불과 4일 15시간 30분 만에 완공되어 다시 재현하기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될 정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비숙련공을 투입하고도 빠르게 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전시 체제로 바뀌면서 많은 남자 조선 기술자들이 징집되자 여성들이 공백을 담당했는데, 리버티선이 대량 생산되었던 1942~1944년에는 노동자의 30퍼센트가량이 여성이었고. 그중 20퍼센트 정도는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를 본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붕어빵 찍어내듯 바다로 쏟아져 나온 리버티선들은 물자와 병력을 가득 싣고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전쟁 물자 공급 임무를 담당했다.


흔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 공신으로 알려진 '랜드 리스(무기 대여법)'에 의한 엄청난 물자의 지원은 리버티선을 비롯한 미국의 어마어마한 수송선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도 컸는데 당연한 일이겠지만 리버티선은 생산량이 많았기에 그 피해도 상당했다. 느린 속도에 비무장이어서 대서양의 늑대로 악명 높았던 독일 유보트들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호위함들이 선단 보호에 나섰지만 전쟁 말기에 유보트 전력이 쇠락하기 전까지 언제 침몰당할지 모를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 간과되고 있지만 미국 수송선단 요원들의 희생 비율이 육군 보병보다 높았을 정도로 그들의 임무는 위험했다.



게다가 원래 생산성에만 주안점을 두다 보니 설계상 내구연한이 불과 5년에 불과할 만큼 선체도 약했다. 이러한 구조적 결함과 함께, 제작에 비숙련공이 대거 투입되어 발생한 용접 불량 등의 이유로 선체와 갑판에 균열이 생기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운항 중 선체가 반으로 나뉘는 황당한 경우까지 벌어졌다.



놀라운 생산성을 자랑하고 전쟁 내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성능이 그다지 좋은 선박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열악한 성능에도 굴하지 않고 유보트가 출몰하는 거친 대양을 가로지르며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배달부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동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다른 함정이나 군용 선박들과 비교해 멋도 없고 성능도 열악했지만 리버티선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진정한 바다의 마당쇠였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