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군함이 북한의 전시품으로 전락한 사연

1967년 12월 2일, 함장 '로이드 부커(Lloyd M. Bucher)'를 비롯한 미 해군 장교 6명, 병사 75명, 민간인 2명을 합쳐 모두 83명을 태운 미 해군 최신예 전자 첩보함 한 척이 첩보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일본 사세보항의 미 해군기지를 떠났다. 그 첩보함의 이름은 '푸에블로호(USS Pueblo)'였다.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1968년 1월 23일, 북한이 P-4 초계정 네 척과 미그기 두 대를 동원하여 원산 앞바다에서 해상 첩보활동을 벌이던 푸에블로호를 나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미 해군 병사 1명이 사망한다.


나포작전에 해병으로 참가했던 북한 군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에 우리가 국적을 밝히라고 하자 놈들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성조기를 띄우며 거만하게 나왔습니다. 아마 미국이라면 감히 어쩌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천만에, 놈들은 오산했습니다. 우리 7명의 해병들은 번개같이 배에 날아들어 순식간에 80여 명의 적들을 모두 체포했던 것입니다."



미국 해군 함정이 외국군에게 나포된 것은 미 해군 역사 106년 만에 처음 일어난 대사건이었다.


미국은 분노하였고, 나포 사건 보고를 받은 백악관에서 보인 즉각적인 반응은 '미국에 대한 전쟁행위로 간주, 평양을 핵무기로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핵공격 주장은 감정이 가라앉으면서 곧 철회되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슨(Lyndon B. Johnson)'은 베트남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던 미국이 한반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매우 신중하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가 처음으로 취한 조치는 소련에게 북한이 푸에블로호 선체와 승무원들을 돌려보내도록 압력을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의 위성 국가였던 북한은 소련의 요청을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우리나라 영해에 들어와 정찰 행위를 감행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법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 올 때에는 제마음대로 왔지만 돌아갈 때에는 절대로 제마음대로 돌아가지 못한다."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소련의 요청마저 거절해 버린다.



여기에 북한의 한 당국자는 "미국 놈들이 항복서를 내기 전에는 푸에블로호 선원들을 절대로 석방하지 않겠다. 그리고 푸에블로호는 우리의 전리품이므로 그놈들이 항복서를 낸다 해도 돌려주지 않겠다. 우리 인민군대가 나포한 미제 무장 간첩선을 먼 훗날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후대들에게 이것은 우리가 미국 놈들에게서 빼앗은 간첩선이라고 말해주겠다."라고 하였다.



북한의 이러한 단호한 태도에 대해 충격과 분노를 느끼고 있던 미국은 세 개의 항공모함을 북한 연안으로 출동 시켰고, 전략폭격기를 서 태평양에 배치하였다.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앞세운 미 해군 구축함과 전함 16척이 울릉도 남쪽 50마일 해상에 정박하였고, 미 공군기 3백72대가 출격태세를 갖추었다. 미국은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행정명령을 발표하여 공군 예비역 1만5천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북한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1968년 4월 14일 밤 11시, 판문점 남쪽 대성동 입구에서 주한미군과 국군 병사들을 수송하던 군용트럭을 북한군 병사들이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기습 공격하여 미군 병사 2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는다.


이러한 도발 이후 북한의 한 매체에서는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 전쟁에는 전면 전쟁으로, 이것은 푸에블로호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광란적인 전쟁소동을 일으켰을 때 우리의 대답이었다."라는 성명서를 내놓는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였고, 미국 의회에서는 동시에 전쟁을 2개나 치룰 수는 없다는 입장이 압도적이었다.


결국 미국은 북한과 협상을 벌인 끝에 미 육군 소장 '길버트 우드워드(Gilbert H. Woodward)'가 미국 정부를 대신하여 북한의 요구와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포로가 되었던 승무원 82명과 시신 한 구를 판문점에서 넘겨받았다. 1968년 12월 23일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오늘도 푸에블로호는 북-미 대결의 상징물로 남아있다. 그 동안 원산 항에 있었던 푸에블로호는 1998년 12월초에 대동강으로 옮겨졌다.


1866년 9월, 대동강에 들어왔다가 격침 당한 미국 선박 '제너럴 셔먼호' 격침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대동강 기슭, 바로 그 기념비 옆에 푸에블로호가 전시되어 있다.



북한의 『로동신문』은 "미국과 전투를 벌여 19세기에는 <샤만>호를, 20세기에는 <푸에블로>호를 전리품으로 만들었으며 앞으로 21세기의 전리품도 여기에 가져다 놓으리라"고 주장하면서, 전리품으로 전시된 푸에블로호를 담은 사진 아래에 이렇게 적혀있다.



"미제야 함부로 날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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