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생활 30년 만에 새 주인을 맞이한 구축함
- 밀리터리
- 2018. 7. 20. 06:00
무기도 하나의 공산품이므로 생산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많이 팔고 싶어 하고, 수요자 입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좋은 품질의 것을 구매하려 한다.
따라서 무기 도입 시에는 다양한 업체들을 경쟁시켜 최상의 그리고 최저의 무기를 구매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거래 패턴이다. 하지만 무기가 일반 공산품과 다른 점은 정치적인 변수가 경제적인 그 어떤 요소보다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미 해군에는 이러한 변수로 인해 진정한 주인을 찾기까지 무려 30년을 방황한 구축함이 있었다.
*미 해군의 키드급 구축함
1973년 이란은 4척의 최신예 구축함을 미국에 주문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당시 이란은 미국의 주요 원유 공급처이자 중동에서 소련의 남진을 막아내던 강력한 친미국가였다. 따라서 미국 외에 유일하게 F-14 전투기를 공급받았을 만큼 최신예 무기의 최우선 공급 대상국이었다.
이때 이란이 도입하기로 한 구축함은 1970년대, 미 해군의 주력이었던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에다가 상위 전투함인 '버지니아'급 순양함의 전투 체계를 결합한 형태여서 당대 최강의 구축함이었다.
*스프루언스급 구축함
이처럼 미 해군의 주력 구축함보다 더욱 강력한 동급 구축함을 이란이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미 해군이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새 전투 체계 '이지스'를 탑재한 새로운 전투함의 도입을 예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78년부터 본격적으로 건조에 들어간 4척의 신예 구축함은 페르시아~이란 역사에 있어 위대한 군주였던 키루스 2세, 다리우스 1세, 나디르, 호스로 1세 의 이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1979년 이란에서 혁명이 발생하고, 반미 정권이 들어서게 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란혁명으로 수십 년간 정권을 잡고 있던 팔레비왕조시대는 막을 내리고, 호메이니가 이란의 최고지도자가 된다.
*이란혁명 전·후의 모습
양국은 순식간 서로를 증오하는 적대국이 되어버렸다. 이에 미국은 이란에 완공 직전에 있던 구축함의 인도를 거부하고 이들을 DDG-993 키드, 994 캘러헌, 995 스코트, 996 챈들러로 명명한 후 자국 해군이 운용하도록 조치했다. 이때부터 이들 구축함들은 미 해군의 '키드급'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순식간 주인이 바뀐 키드급은 이지스 기능을 탑재한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과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이 미 해군의 주력으로 속속 등장하자 그 위치가 어정쩡하게 되었다.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은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을 베이스로 하여 이지스 시스템을 탑재한 최초의 군함이다.
*알레이버크급 구축함
동종의 여타 전투함들이 급속히 도태되면서 4척의 키드급 구축함을 별도로 유지하기가 갈수록 애를 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키드급 구축함
결국 1990년대가 되자 이들을 퇴역시켜 외국에 판매하기로 결정했고, 오스트레일리아와 그리스에 구매 협상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미 해군에서 이들을 '아야툴라(이란 혁명 이후의 지도자 호메이니를 빗댐)'급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키드급 구축함이 미 해군 내에서 왠지 의붓자식처럼 여겨지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호메이니는 이란 왕정을 부정하고 이란의 서구화·세속화 정책에 반대하였다.
이처럼 제작국에서조차 서자 취급받던 키드급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게 된 것은 최초 주문이 이루어진지 30여 년만인 2004년이었다. 이들의 새로운 주인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중국의 방해로 신예 전투함 확보에 애를 먹던 대만이었다.
미국은 이들 함정을 대만에 공급하면서 중국의 대외 팽창을 적절히 견제할 수 있었고, 반면 최신예 함을 제공할 때 생길 수도 있는 중국의 반발도 억제할 수 있었다. 더불어 건조한지 30년이 되가는 계륵 같은 함정들을 시원하게 처분하게 되었다.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은 셈이다.
*2005년 대만이 인수한 키드급 구축함
이들 함정은 대대적인 개수 작업을 거쳐 2005년 2척이 대만 해군에 인도된 것을 시작으로 2006년 전량 대만 해군이 취득을 완료하였다.
대만은 키드급 중 '995 스코트'함을 초도함으로 인수하면서 이를 'DDG-1801 기룽'으로 명명하였고, 이때부터 사연 많았던 키드급 구축함은 기룽급 구축함으로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이란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었지만 여러 상황으로 말미암아 이리저리 정처 없이 떠돌다 무려 30년 만에 주인을 찾게 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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