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사회의 압박으로 핵 개발을 포기한 국가들
- 밀리터리
- 2018. 7. 17. 06:00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것은 그 나라의 군사적, 정치적 위상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특히 궁지에 몰려있는 국가들이 리스크를 안고서도 핵 개발에 매달리는 이유고, 한 번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이를 포기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드문 경우지만 핵을 일시적으로 보유했다가 포기한 경우도 있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핵보유국 반열에 올라선 신생 국가들
냉전시절, 소련이 각 연방국들에게 분산 배치했던 핵무기들이 급작스러운 소련의 붕괴로 연방국들이 해체되면서 이들 국가에서 핵무기를 회수하지 못해 벨라루스, 카자흐, 우크라이나가 핵무기 보유국이 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갓 건국한 입장에서 핵을 유지할 능력도 없었고, 이를 뒷받침할 재래식 전력도 러시아에 한참 밀렸다. 결국 이들은 천연자원 및 경제지원과 국경 확정 등의 반대 급부를 받고 러시아에 모든 핵무기를 이관했다. 이 경우는 세 국가 모두가 비대칭 전력 달성을 통한 군사적 우위 달성보다는 경제 및 정치적 지원을 더 우선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아프리카의 백인 정권이 만들어낸 핵무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우는 1948년부터 이미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가졌으며, 60년대에는 미국으로부터 평화적 사용을 목적으로 제공받은 원자로와 핵 기술을 핵무기 개발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남아공은 자국에서 캐낸 우라늄과 일부 해외 국가의 비밀 지원을 통해 1980년까지 총 여섯 발의 핵무기를 제조했다. 그러나 '칼라하리' 사막에서 핵실험을 실시하려던 중 차질이 발생했다.
1977년 8월경 소련 정보기관이 실험 징후를 탐지해 미국에 통보했고, 이에 미국이 스파이 정찰기를 띄워 실험지역을 확인한 것이다. 결국 남아공 정부는 실험을 전면 취소했으며 지하로 파놓은 핵실험용 갱도도 봉해버렸다. 이후에도 남아공 정부는 계속 실험 기회를 엿봤으나 실패했고, 국제 사회의 압력과 비난이 거세지자 결국 1989년 부로 핵 개발 프로그램을 전면 폐기했다.
남아공은 핵을 폐기한 후 NPT에 서명했으며, 흑인 정부 시절인 1994년에 '국제 원자력 기구(IAEA)' 사찰을 받아들여 6기의 핵무기가 모두 해체된 것을 검증받았다.
남아공의 경우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핵을 자발적으로 폐기한 유일무이한 사례로 꼽히지만, 인접국 중 직접적인 위협 국가도 없는 데다 백인 정권의 몰락이 맞물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한민국'과 '대만'의 핵무기 개발 시도
최근 미국이 해제한 1970년대 기밀자료에 따르면 대만 또한 1960년대부터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었다고 밝혀졌다. 대만은 가뜩이나 재래식 전력에서 차이가 나는 중국이 핵까지 보유하게 되자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자체 핵 개발에 나섰다.
대만은 '장징궈' 총통 시절 해외에서 핵 기술을 도입하고 자체적으로 농축 기술을 개발하려 했다.
이에 미국의 포드 행정부는 징후를 읽고 대만에 압력을 넣었으며, 대만은 1976년 9월 핵 개발을 중단하겠다고 확약했으나 이듬해 IAEA 사찰단이 조사를 실시하던 중 연구용 원자로 시설 밖에서 사용 후 연료를 전용하려는 것을 포착했다.
1978년에도 미국의 핵 전문가들이 대만에 방문했다가 무기화 용도가 명백한 레이저 우라늄 농축 기술을 연구 중인 것을 포착하면서 카터 행정부는 대만 원자력 발전소를 위한 수출허가를 끊겠다고 압력을 넣었고, 결국 대만이 이에 승복하면서 최종적으로 핵 개발이 무산됐다.
이에 대한 보상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미국은 이후 냉전 기간 내내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배치해 한·일·대만에 대한 핵우산을 제공했다.
우리나라 또한 1970년대에 핵무기 개발 시도가 있었고, 2000년에도 핵무기 개발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68년, 핵보유국을 주측으로 더 이상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겠다는 핵 확산 금지조약(NPT)이 체결되면서 신규 국가가 핵무기를 취득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물론 그 이면의 정치에는 기존 핵 보유 국가들이 현상 유지를 지향해 군사력 우위를 확보할 목적이 깔려있겠지만, 전투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학살하는 '대량학살무기'의 잔인함, 그리고 한 번 터질 경우 분쟁이 끝난 뒤에도 두고두고 영향력이 잔류하게 되는 환경적, 생물학적 문제 때문에 국제 사회가 반대하는 영향도 크다.
이런 상황에서 핵을 제조하는 데는 재료와 시간, 은밀성의 확보, 실험의 기회와 장소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국제 사회의 비난과 경제적 제재, 기존 동맹이나 외교 관계의 불이익도 감수해야 한다. 남아공과 대만이 중도에 핵을 포기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 자국민의 안전과 국제 외교에 관심이 낮은 북한은 끝까지 핵을 포기하지 않았고, 모든 것과 맞바꿔 핵을 보유하게 됐으니 이를 스스로 포기할 가능성도 매우 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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