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략 정찰기가 북한의 고물 전투기에 격추된 사연

1969년 4월 15일, 오후 미 해군 7함대 소속 비무장 정찰기가 동해 상공에서 북한 전투기에 피격... 승무원 31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일본 '아츠기'에 있는 해군 항공기지를 이륙한 미국의 'EC-121 정찰기'는 동해를 통해 소련 극동 공군이 포진한 '블라디보스토크'를 정찰하고 이어 북한 쪽을 훑으며 남쪽으로 내려오곤 했다.



1969년 4월 15일, 이날도 어김없이 공중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함경북도 무수단 근해의 목표 상공까지 배행 후 오산기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 정찰기에는 8명의 장교와 23명의 엔지니어가 탑승하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미국 해병대원이었다.


오후 2시, 청진 동남방 바다 위를 비행하던 'EC-121 정찰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는 보고가 미 해군기지에 들어온다.


그로부터 2시간이 지난 오후 4시, 평양방송은 "우리 영공을 침범한 미국 해군 소속 EC-121 정찰기가 북한군 MiG-21전투기에 격추되었다."고 발표한다.



당시 EC-121 정찰기는 프로펠러 비행기로 속도는 느리지만 당시로서는 최고 성능의 레이더와 전자 장비를 갖춰 북한 전투기가 뜨면 먼저 발견하고 달아날 수 있었다.


북한에게는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동해를 관할하는 북한 어랑 비행장에는 한국전 때 활약한 구닥다리 'MiG-15 전투기' 밖에 없었다. EC-121을 격추하려면 마하 2 정도의 속도를 가진 최신형 전투기가 필요했다.


이에 북한은 미군 정찰의 눈을 피해 평양에서 두 대의 MiG-21을 분해해 열차편으로 어랑 비행장으로 옮겨 몰래 기체를 조립하고는 EC-121이 동해로 진입하기만을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작전이 감행된 4월 15일은 김일성 생일날이었다. MiG-21은 해수면 위를 근접 비행하는 방식으로 EC-121의 레이더망을 무력화한 뒤 EC-121의 바로 밑에서 솟구쳐 올라 미사일을 발사했고, EC-121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동해로 추락했다.


이로 인해 탑승자 31명 전원이 사망하는데...


사건 발생 직후, 미 국방부는 소련, 중국, 쿠바 등지에서의 정찰비행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아울러 두 개의 항공모함 선단을 동해에 출동 시키고, F-4 전폭기들을 남한에 긴급 배치, 원산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였고, 공산측의 요청으로 290차 군사정전위가 긴박하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으나, 미국의 응징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닉슨 행정부는 전술 핵무기를 사용한 보복 공격을 검토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1년 전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피랍됐을 당시 닉슨은 미온적인 대응을 한 존슨 대통령을 비난한 바 있었는데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자마자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정찰기 격추 사건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대통령이 된 상황에서 무력시위 외에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치 속에 넉달이 흘렀고, 8월 17일 또 한 번의 북한의 도발이 감행된다.

한강 하구의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북한군이 미군 헬리콥터(OH-23)를 격추한 것이다. 거기에 타고 있던 미군 병사 세 사람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1969년 12월 3일,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사과문에 서명을 하고 나서야 미군 병사를 데려갈 수 있었다. 이로써 EC-121 격추 사건은 북한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냉전시대, 세계 최강임을 자부하던 미국에는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게 된 사건이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