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악의 그날, 한반도가 통일을 못 한 이유

1946년 6월 3일, '미소공동위원회'의 무기 휴회 후 지방 순회강연에 나선 이승만은 정읍에서 새로운 제안을 했다.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를 조직하여야 할 것이다."


당시 이 발언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제창하는 발언으로 간주되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후 미 군정은 '좌우합작운동'에서 이승만을 제외했고, 이에 이승만은 직접 미 국무부를 상대하여 정책을 바꾸려 했지만,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한국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한편 김구는 국내에서 반탁운동을 이어나가면서 미 군정과는 별개의 과도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우익 진영의 정당, 사회단체를 모아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이 기구를 통해 새로운 임시정부를 조직하려 한것이다.



1946년 7월, 조선공산당은 미 군정에 타격을 주는 전면적인 대중투쟁을 벌이는 신전술을 발표했고,

9월, 주요 도시에서의 총파업 투쟁과 10월,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시위와 봉기를 일으킨 좌익 때문에 정치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곤란이 가중됐다.


1946년, 북한이 공산주의 방향으로 확고히 나아갈 때 남한은 미 군정의 실효성 없는 정책과 정치세력 간의 투쟁으로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1947년 봄, 평양에서는 제2차 미소 공동위원 회의가 개최됐다. 소련은 반탁운동을 계속하는 정당 사회단체는 서약서를 내더라도 참가시킬 수 없다고 주장해 미국과 또 한번 대립하여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도 결렬됐다.



한반도 문제를 빨리 매듭짓고 싶었던 미국은 소련에 영국과 중국을 포함한 4자 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안했으나, 소련은 이를 거부했고, 미국은 UN에서 한국 문제의 해결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1947년 9월, 미국은 유엔 총회에 한국 문제의 의제 채택을 요구했고,

1947년 9월 23일, 유엔총회가 한국문제를 의제로 채택하면서 한국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1947년 11월 14일, UN은 총회를 열고 UN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이후 UN 한국 임시위원단은 남한 조사 이후 북한에서도 조사를 하고자 했으나 소련이 이를 거부했고,

1948년 2월 26일, 소총회를 열어 남한에서의 선거를 결정했다.


이를 얌전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던 소련과 남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은 미소 양군 조기 철수와 조선인들에 의한 조선 문제 처리 주장 등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노린 제안을 했고, '남로당'은 폭력 투쟁을 불사하며 전국 곳곳에서 파업과 시위를 벌여 경찰과 유혈 충돌했다.



특히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남로당 세력이 선거를 막기 위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는데 군대와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선거를 둘러싸고 남한 우익과 남북한의 좌익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우파의 김구를 포함한 남한의 중도파들이 선거 반대로 돌아섰다. 선거가 치러질 경우 분단이 굳어지리라는 이유에서였다.


1948년 2월,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 지도자 회담을 열자는 제안을 했지만, 묵묵부답이다가 한 달도 더 지난 3월 25일, 북한 정권은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연석회의를 열자'고 통보했다.


북한은 북한이 먼저 분단 정권을 수립했다는 역사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을 불렀다.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 정권에 이용만 당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지만, 조국의 분단을 막을 마지막 기회라는 애국충정에 북으로 향했다.



평양에서의 연석회의는 우려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남한의 단독선거를 비난하는 결의로 이어졌고, 딱히 협상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 소련이 있었고, 5월 5일에 김구 일행은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왔다. 조국의 분단을 막고자 한 충정은 소련과 북한의 계략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선거 불과 닷새 전이었다.


1948년 5월 10일, 태극기가 집집마다 게양됐고, UN 한국 임시위원단에서 파견한 30명 감시원의 감시 아래 치러진 대한민국의 첫 총선은 투표율 95.5%를 기록하며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됐다.



1948년 7월 20일, 국회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선출됐고,

1948년 8월 15일,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한반도 유일한 합법 정부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1948년 9월 9일, 대한민국 정부 출범 약 20일 뒤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생겼고,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그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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