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생선이었던 아귀가 고급 어종에 등극한 사연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 1949년의 부산 인구는 약 47만 명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는 수많은 피난민으로 인해 인구수가 84만 명으로 불어난다. 공식 통계가 이 정도니 실거주 인구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도시 인구가 일 년 사이에 최소 2, 3배가 늘어난 것이다.


*한국 전쟁 당시 국제시장



이처럼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면서 부산에서는 먹을 것 자체가 귀해졌다. 그렇다고 전시 비축 식량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원조물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순식간에 증가한 피난민까지 먹여 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살기 위해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까지 먹었다. 미군부대에서 버린 음식물 쓰레기로 꿀꿀이죽을 끓였다.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던 꿀꿀이죽은 전쟁이 끝나고 생활 형편이 나아지자 곧 사라졌다. 


한편, 예전에는 식재료로 잘 사용되지 않다가 형편이 어려운 전쟁통에 그 가치를 재발견하고, 나중에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국민음식으로 발전하는 것도 있었다. 이런 음식 중 하나가 겨울철에 어울리는 '아귀찜'이다.



아귀찜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70년대다.

아귀찜의 원조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대체로 마산에서 아귀를 북어찜처럼 콩나물과 미나리, 마늘, 고춧가루 등의 양념과 함께 찜으로 요리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6·25 전쟁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난 다음이다.


아귀찜이 등장한 것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이지만 많은 사람이 아귀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때였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아귀는 그다지 즐겨 먹는 생선이 아니었다.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는 '물텀벙이'라는 아귀의 별명에서도 알 수 있다.



아귀가 그물에 걸리면 어부들이 재수 없다고 바다에 던져버렸는데, 이때 물에 빠지는 소리가 '텀벙'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흉측하고 못생겨서 맛도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귀는 맛을 떠나 생김새 때문에 구박을 받는 생선이었는데,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전 영국에서는 아귀를 '가난한 사람이 먹는 바닷가재'라고 불렀다. 맛은 바닷가재와 비슷하지만, 부자들은 먹지 않는 생선이라는 것이다. 입맛이 떨어질 정도로 볼품이 없어서 주로 돈 없는 서민들이 먹었기에 얻은 별명이다.


이랬던 아귀가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 때 피란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면서 제대로 생선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면서 부산에서는 먹을 것 자체가 귀해졌다. 그래서 예전에는 거의 버리다시피 했던 아귀를 사다가 먹었다. 당시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물꽁(물꿩)'이라고 불렸던 아귀는 생선 중에서 가장 값이 쌌기 때문에 돈 없는 피란민도 구해 먹을 수 있었다. 아귀를 손질해 무와 파를 넣고 시원하게 탕으로, 혹은 양념장에 찍어 수육으로 먹으면서 배고픔을 달랬다.


이렇게 간단하게 간을 한 후 먹는 아귀의 담백한 맛에 익숙해질 무렵, 1970년대를 전후해 마산 아귀찜이 유행했다. 그 결과 지금은 버리는 생선이었던 아귀가 값이 만만치 않은 어종으로 바뀌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생선이라고 아귀를 구박했던 영국의 사정도 비슷하다. 제2차 세계대전 무렵, 생선이 귀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아귀를 먹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금 아귀 소금구이는 바닷가재보다 더 대접받는다. 아귀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승천한 셈이다. 아귀찜이 발달한 과정에도 전쟁의 아픔, 그리고 상처를 겪어 낸 사람들의 삶이 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